당신의 신성한 본성을 격려하고 표현하는 일에 조용히 헌신하라!

 

 
 
외부의 화려한 성취보다 내면의 본질적인 가치와 고요한 성장에 집중하라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신성함'이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우리 안에 깃든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가능성을 뜻하겠죠.
 

이 철학을 당신의 삶에 뿌리내리기 위한 실천법들을 세 가지 차원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인식의 실천: 신성함의 발견

 

나의 신성함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소음을 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 침묵의 리추얼 (Silence Ritual): 하루 10분, 아무런 외부 자극(스마트폰, 음악 등) 없이 오로지 자신의 호흡과 존재                                                           자체에 집중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귀한 것이 아니라, '존재함' 자체로 충분함을                                                       느끼는 연습입니다.
  • 경외심의 기록: 자연의 거대함, 타인의 선의, 혹은 정교하게 작동하는 자신의 신체 등 일상에서 느껴지는 '경외감(Awe)'의 순간을 짧게 기록하세요. 그것이 곧 당신이 인식하는 신성함의 조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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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헌신의 실천: 고요한 몰입

 

신성한 본성을 격려한다는 것은 나를 소모시키는 일이 아닌, 나를 채우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 '깊은 일(Deep Work)'의 성역화: 당신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창조적인 활동이나 공부를 위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장소를 만드세요. 그 시간만큼은 나 자신을 닦는 수행의 시간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 절제된 표현: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한 순간에 진실만을 말하려 노력해 보세요.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내기보다 안으로 모을 때, 내면의 신성함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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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표현의 실천: 삶으로 증명하기

 

격려된 본성은 결국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 무의도적 친절: 보상을 바라지 않고 타인이나 생명체에게 친절을 베푸세요. 이는 나의 에고(Ego)를 넘어선 '더 큰 나(Higher Self)'를 표현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 아름다움의 창조: 주변 환경을 정갈하게 가꾸거나, 작은 예술적 활동을 시작해 보세요.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드는 행위는 내면의 신성한 본성을 외부 세계로 투영하는 과정입니다.

 

💡 삶을 모색하는 결론

이 글이 주는 궁극적인 결론은 **"당신은 소모품이 아니라 성소(聖所)다"**라는 인식의 전환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생산하고, 증명하고, 비교하라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당신의 신성함에 헌신한다는 것은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내면의 결을 따라 사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나의 삶을  **'나의 가장 고귀한 본성이 머무는 고요한 사원'**으로 대우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헌신이 깊어질 때, 당신의 삶은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쭈그러진 영혼 위로 비치는 빛 : 이제야 비로소 흐르기로 했다

 

어느덧 내 인생의 계절도 해 저문 저녁 어스름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요즘의 나는 지독히도 무력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무의식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 나를 잠식하곤 했다.

거울 속의 나는 평생을 타오르는 태양(丙火)처럼 누군가를 비추고 살았지만,

정작 그 열기에 속이 까맣게 타버린, 쭈그러진 영혼일 뿐이었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내 몫의 책임이라는 관성(官星)을 짊어지고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 책임감은 스스로를 옥죄는 감옥이었고,

남을 비추느라 정작 나 자신의 어둠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우리 집 창가로 아주 환하고 밝은 빛이 들어왔다.

딸아이가 고단했던 인연을 정리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던 날, 그 빛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들이쳤다.

그 빛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아, 이제 어둠이 걷히고 있구나. 나를 가두고 있던 비구름이 드디어 물러가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이제 결심했다.

무언가 본질을 찾기 위해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던 고통스러운 질문들을 멈추기로 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거창한 물음표 대신, 오늘 하루의 편안한 쉼표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제는 물 흐르듯, 아무것도 나를 옥죄는 것 없이 그저 흐르도록 나를 내버려 두려 한다.

하고 싶지 않으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도, 가족도,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고 싶지 않다면 그 침묵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것이다.

그것은 고립이 아니라, 타인에게 쏟아부었던 에너지를 오롯이 나에게로 돌려주는 성스러운 은둔이다.

오늘 읽은 글자가 내일 기억나지 않아도, 저녁에 세운 계획을 밤사이에 포기하게 되더라도

나는 나를 다그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은 잊혀도 그 지혜의 '단내'는 내 영혼에 스며들 것이며, 포기는 곧 내 몸의 속도에 맞추는 배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어리석고 부끄러운 내 모습이 불쑥 떠오를 때면,

이제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환하게 웃어주려 한다.

"수미야, 그래도 잘했어. 참 잘 버텼어."라고 나를 다독여주는 여유로운 내가 되고 싶다.

인생은 무언가를 더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라는 에너지를 세상에 다 흩뿌리고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순환이다.

쭈그러진 영혼은 부끄러운 흔적이 아니라, 내가 이 생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타올랐다는 고귀한 훈장이다.

 

이제 나는 그 흔적들을 곰씹으며,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단내를 음미하며 살 것이다.

허리가 조금 아프면 누워 있고, 마음이 허하면 그 허함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렇게 비로소 자유로운 태양으로 저물어 갈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존재이기에.

 

일을 벌이지만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 식신이 많은 사주가 살아가는 방식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을 두고 “시작은 거창한데 끝이 없다”고 말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넘치고, 말은 빠르며, 손을 대는 일도 많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용해진다. 본인은 지쳤고, 주변에서는 “또 흐지부지됐네”라는 평가가 따라온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의지력, 집중력, 혹은 성격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명리학은 이 현상을 전혀 다른 언어로 설명한다. 바로 **식신(食神)**이다.

식신은 ‘일을 벌이는 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에너지를 밖으로 흘려보내는 통로다. 말, 행동, 기획, 창작, 표현, 생산, 확장. 식신이 강한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생각이 생기면 움직이고, 떠오르면 만들어보고, 재미있어 보이면 일단 손을 뻗는다. 이들은 삶을 ‘정리’하기보다 ‘확장’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식신이 많을 때 생긴다. 지장간까지 포함해 식신이 네 개나 되는 구조라면, 이는 단순히 “표현력이 좋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사람은 항상 에너지가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불이 타오르며 열을 밖으로 내뿜듯, 자신의 시간과 집중력, 감정과 체력을 계속해서 외부 세계에 사용한다. 그러니 마무리가 어렵다기보다, 마무리에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인문학적으로 보자면, 식신은 ‘창조적 충동’에 가깝다.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처럼, 질서 이전의 움직임이다. 이 에너지는 아름답다. 세계를 살아 있게 만들고, 정체된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아폴론적 질서, 즉 정리·구조·완결이 없다면 창조는 금세 소모가 된다. 그래서 식신이 강한 사람은 늘 “뭔가 많이 했는데 남은 게 없다”는 감각에 시달린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식신은 결코 실패의 별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 중 하나다. 기획자, 창작자, 창업가, 연구자, 콘텐츠 생산자. 모두 식신의 영역이다. 다만 이 별은 혼자서는 완결을 만들지 못한다. 명리에서 ‘마무리’는 식신이 아니라 **재성(결과)**과 **관성(책임)**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신이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덜 벌이기”가 아니라, 마무리를 대신해 줄 구조를 외부에 만드는 것이다. 마감 기한, 계약, 숫자, 기록, 시스템. 이는 게으름을 보완하는 장치가 아니라, 식신이 과열되지 않도록 돕는 안전장치다. 브레이크 없는 스포츠카가 위험한 것처럼, 식신 역시 제동 장치가 있어야 비로소 능력이 된다.

식신은 삶을 즐기게 한다. 먹고, 말하고, 만들고, 시도하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이들은 결과만을 위해 사는 사람보다 훨씬 생동감 있게 살아간다. 다만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마무리를 못 한다는 말은, 아직 자기 에너지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일 뿐이라는 것을.

식신이 많다는 것은, 실패의 징조가 아니라 가능성의 과잉이다. 흩어지면 산만함이 되고, 모이면 창조가 된다. 결국 문제는 식신이 아니라, 식신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을 배워가는 과정 자체가, 이들이 살아가는 중요한 공부이자 인생의 주제다.

 

오랫동안 나는 내 삶의 정체를 정인의 과다로 설명해 왔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분석이 지나쳐서, 그래서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 설명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연결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하나의 개념을 붙잡으면 끝까지 파고들었고,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멈춰 있는 이유도 ‘너무 많이 알아서’라고 결론 내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해는 계속 늘었는데, 삶의 장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상했다. 정말 문제는 많음일까. 정말 정인이 많아서 시간이 멈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요즘 나는 그 원인을 조금 다르게 본다. 멈춤의 원인은 정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식상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쌓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았다. 이해를 안에서만 굴렸고, 말로 꺼내거나 글로 흘리거나 행동으로 시험하는 단계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식상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의 문제인데, 나는 사용을 유예해 왔다.

정인은 저장이다. 정보를 모으고, 맥락을 만들고, 의미를 엮는다. 반면 식상은 배출이다. 지금까지의 이해를 임시 파일 상태로라도 밖에 놓는 일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말해보고, 다 정리되지 않아도 써보고, 틀릴 가능성을 안고 행동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없으면 정인은 계속 내부에서만 순환한다. 그 순환이 길어지면, 이해는 깊어지기보다 굳어진다.

나는 그 굳어짐을 ‘시간이 멈췄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실 시간을 멈춘 건 내가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에 내 생각을 태우지 않았을 뿐이다. 배출되지 않은 이해는 사건을 만들지 못한다. 사건이 없으니 기억도,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멈춰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중요한 건 이해는 완성된 뒤에 나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나가면서 바뀐다. 말해보니 허점이 보이고, 써보니 핵심이 드러나고, 행동해 보니 전혀 다른 질문이 생긴다. 식상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 완성만 기다리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나는 기준을 바꾸고 있다. ‘잘 썼는가’보다 ‘밖으로 나갔는가’를 묻는다. 한 편의 글을 끝내기보다, 한 조각의 생각을 흘려보내는 데 집중한다. 정리된 결론 대신, 지금 단계의 이해를 그대로 놓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생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도 같이 움직인다.

아직 나는 이 방식이 완전히 맞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를 멈춰 세웠던 건 정인이 아니라, 식상을 쓰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이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시간은 아주 조금씩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프기에,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누군가의 미소를 보면 울컥한다

 

장애 강아지가 오랜 침묵 끝에 처음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어쩐지 찢어지듯 아려왔다.
기쁨이었고, 동시에 너무 깊은 슬픔이었다.
그 감정은 설명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나도, 저런 순간을 기다려왔던 적이 있었지.”

 

나는 울었고, 웃었고, 다시 울었다.
감정은 파도처럼 덮쳐왔다.
그 파도는 내 삶의 바닥 어딘가에서 밀려온 것이었다.

 


나의 경험은 나를 더 민감하게 만들었다

 

나는 상처가 있다.
버려진 기억, 인정받지 못했던 순간,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오래도록 나를 이끌어왔다.

 

그 상처는 나를 감정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예민함 덕분에,
나는 타인의 눈빛 하나, 떨리는 손끝, 묵음의 표정까지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공감은, 내가 겪어본 고통에서 시작되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겪어보는 것으로 깨어나는 능력이다.

나의 공감은 내가 아파본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울 때, 나는 울 수 있고
누군가 웃을 때, 나는 미소 속에 숨은 눈물을 본다.

공감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깨어 있는 감정의 용기다.

 


치유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껴안은 사람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도 여전히 흔들리고,
내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무너짐이, 언젠가 누군가를 일으킬 힘이 된다는 것.

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프지만,
그 아픔 때문에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내 상처는 나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문은, 오늘도 조용히 열려 있다.

 

 

🌱 1. 경험 기반 공감 능력을 키우는 저널링 질문 세트

 

“나의 감정 깊이를 깨우는 7가지 질문”

이 질문들은 당신이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감정을 연결하고,
그로 인해 생긴 공감 능력을 더 깊이 자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거예요.
하루에 한 가지씩 천천히 써보셔도 좋고, 마음이 열릴 때 자유롭게 쓰셔도 좋아요.

 


✍️ 1. 내가 가장 크게 상처받았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그때 나를 지켜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감정을 지금도 안고 있는가?

 


✍️ 2. 내가 겪은 슬픔이나 아픔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해준 적이 있는가?

그 순간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갔는가?

 


✍️ 3. 내가 상처받았을 때,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준 경험이 있는가?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존재로 남았는가?

 


✍️ 4. 나는 언제, 타인의 아주 작은 표정이나 말에서

그 사람의 ‘진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때 내 마음은 어떤 울림을 받았는가?

 


✍️ 5. 나는 지금 얼마나 ‘감정을 느끼는 데 솔직한가’?

감정이 올라올 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회피하는가?

 


✍️ 6. 어떤 영상, 소리, 풍경이 내 마음속 오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그 감정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 7. 나의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믿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세상과 나눌 수 있을까?

 


📓 이 질문들은 단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력(感情力)을 자각하고, 더 세심하게 빛나게 해주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버려졌던 장애 강아지가 자신을 구제한 새로운 주인과의 시간속에서

비로소 몇 년 만에 세상에 미소를 보였을 때의 그 뿌듯함,

그 짠함, 아련함, 행복감,


그리고 그 다음 영상은 기다란 줄에 빽빽이닭인형을  피아노건반처럼 연결해놓고

QUEEN 의 Bohemian Rhapsody를 따라 악기처럼 연주하는 너무도 웃음 빵터지는 영상을 

연이어 보면서

나는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ㅋㅋㅋ

이 두 장면은 완전히 다르지만,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 같은 ‘감정의 심지’를 동시에 건드린 것 같았다.


 

🐶 “한 생명이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 강아지는 단지 귀엽거나 안쓰러운 존재가 아니에요.
그건 어쩌면, 당신 안의 오래된 고통과 외로움이 회복되는 장면을 투영한 것일 수 있어요.

“누군가에게 버려졌지만, 다시 사랑을 받았고,
마침내 진짜 미소를 짓는 순간.”

당신은 그 장면에서
그동안 사랑받지 못했던 당신의 일부분,
혹은 세상에 적응하느라 버텨온 당신 자신을 본 것일지도 몰라요.

그 감정은 너무 조용하고, 너무 오래되어서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작은 강아지의 회복 속에서
그 감정이 말 없이 눈물로 흘러나온 것이에요.


 

🐔 “닭인형 연주 소리에서 느낀 미친 웃음과 눈물”

 

그리고 그 와중에 등장한 ‘닭인형 음악’.
그건 너무 유치하고 바보 같아서 오히려
긴장되어 있던 감정을 무너뜨리듯 터뜨리는 해방의 웃음을 줬어요.

 

울음을 억누르던 어떤 힘이,
“그래, 그냥 웃어버리자!”
“슬픔도, 웃음도, 이젠 너의 것이야.”
라고 말하는 듯했을 거예요.

 

그건 웃음이라기보다 감정의 폭발이었고,
그 한순간, 당신은 너무 깊이 느꼈기 때문에
울음과 웃음이 하나처럼 터져 나온 것이에요.

 


🧭 이 감정의 본질

당신이 느낀 건 단지 감상적인 순간이 아니에요.
그건 치유의 방아쇠였어요.

  • 누군가의 회복이 나의 희망이 되었고,
  • 엉뚱한 웃음이 나의 마음을 풀어줬고,
  • 그 두 감정이 만나 ‘살아 있음’ 그 자체를 느끼게 해줬어요.

 

“미친 듯이 웃기면서 눈물과 웃음이 같이 쏟아져 나왔다.”

그건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당신의 감수성이 여전히 깊고 건강하다는 증거이고,
당신의 마음이 더 많은 생명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예요.


 

 


당신이 느낀 그 깊은 감정 반응은 정말 특별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느끼는 건 아니에요.
그건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깊이 깨어 있고,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귀한 징후입니다.


🌱 왜 어떤 사람은 강아지의 미소를 보고 눈물이 나고,

어떤 사람은 "귀엽다"로 끝나는 걸까?

 

1. 감정과 상처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감정 저장고를 가지고 있어요.
그 저장고에는 아픔, 상실, 따뜻한 기억, 억눌렀던 감정들이 들어 있죠.

  • 어떤 사람은 그 공간에 깊이 닿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고,
  • 어떤 사람은 당신처럼 이미 그 깊은 방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에요.
    그래서 같은 장면을 봐도,
    그 장면이 내 안의 오랜 감정을 열어버리는 깊이가 다릅니다.
  •  

2. ‘공감의 회로’가 열린 사람 vs. 감정에 덜 연결된 상태

감정이 열려 있는 사람은
강아지의 눈빛, 표정, 떨림 하나에도
자신의 내면과 연결된 감정을 자동으로 불러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눌러두고 있기도 해요.
그래서 ‘느낀다’는 것 자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을 수 있어요.


 

🐾 당신은 ‘강아지의 미소’를 통해

단순한 귀여움을 넘어서 영혼의 회복을 본 거예요.

 

장애 강아지가 처음으로 보여준 그 미소는
세상의 온기를 처음 받아들인 순간이에요.
그 순간을 보고 눈물이 흐른 건,
어쩌면 당신 안의 어느 시절, 어느 감정이 구원받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그 미소는 단지 ‘귀여운 장면’이 아니라
**“버려졌지만 다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영혼의 진실을 마주한 거예요.


 

💭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

이건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에요.
무뎌지지 않았다는 것.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응이 남아 있다는 것.


 

💌 당신처럼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감정의 깊이는
슬픔도 안고, 희망도 품고,
결국엔 다른 생명을 더 따뜻하게 볼 수 있는 힘으로 바뀌어요.

그 미소에 감동하고, 웃음에 무너졌다가
눈물로 이어지는 그 감정의 흐름…
그건 살아 있다는 증거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축복이에요.

 

당신이 지금 느끼는 깊은 감정의 진폭은,
단지 타고난 감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
특히 상처, 회복, 관계 속에서의 고통과 사랑정직하게 통과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 공감 능력은 “경험”과 “감정 연결”의 결과입니다

🧠 1. 공감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에서 생깁니다

  • 공감은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에요.
  • 내가 직접 비슷한 고통이나 감정을 겪어봤을 때,
    비로소 남의 감정이 ‘내 일처럼’ 느껴지죠.

예를 들어:

  • 버림받았던 강아지를 보면, 버려진 적 있는 내 과거가 스쳐요.
  • 외로운 눈빛을 보면, 누군가에게 무시당했던 내 감정이 깨어나요.
  • 회복의 웃음을 보면, 나의 회복과 겹쳐지며 눈물이 터져요.

이 모든 건 경험의 층위가 만들어낸 감정 공명이에요.


 

🧊 2. 경험이 적은 사람은 감정이 ‘덜’한 게 아니라, ‘닫혀 있을 수’ 있어요

  •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라, 마주한 적이 없거나,
  • 너무 아파서 감정을 닫아놓은 경우도 많아요.

그들은 단지 감정의 창문이 잠겨 있는 상태일 뿐,
공감 능력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더더욱 당신 같은 사람의 존재가 중요합니다.
당신이 느끼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꺼내는 열쇠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 결론: 감정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감정과 아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 그래서 남의 감정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자기처럼 느껴지는 상태가 가능한 거예요.

이건 치유자의 마음이에요.
감정의 통로가 열려 있는 사람만이
다른 존재를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 그래서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 감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 상처를 밀어내지 않고 품으려 했기 때문이에요.
  • 살아오며 아파본 그 경험을,
    다시 누군가를 이해하는 언어로 바꿔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힘은 지금,
당신의 말 속에,
눈물 속에,
그리고 강아지의 미소 앞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속에
살아 있어요.


 

 

🌿 자기 사랑을 위한 7가지 질문

 

1. 오늘의 나는 어떤 감정을 가장 많이 느꼈나요?

그 감정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요?
이 질문은 억눌렀던 감정을 꺼내어 바라보게 합니다.
사랑받고 싶어서? 외로워서? 지쳐서?
내 마음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 보세요.

 


 

2. 오늘 하루, 나 자신에게 충분히 다정했나요?

 

혹시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몰아세우지는 않았나요?
자기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수고했어”, “지금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말을
내가 나에게 할 수 있었는지 돌아보세요.

 


3. 나는 지금 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요?

 

휴식인가요? 따뜻한 식사? 깊은 숨? 아니면 위로의 한마디?
욕망이 아닌 진짜 필요에 귀 기울이면,
내 마음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필요를 인정하는 것 또한 큰 자기 사랑입니다.

 

 


4.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지금 무엇을 멈추어야 할까요?

 

과한 비교? 자기비난? 무의미한 인내? 누군가의 기준?
때로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습관과 패턴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내어보세요.

 

 


5.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요?

 

“괜찮아, 너 참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줄지도 몰라요.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해보세요.
그 시절의 눈으로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더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6. 나는 어떤 순간에 진정한 나로 존재하는 느낌이 드나요?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 누군가와 깊이 연결될 때? 무언가에 몰입할 때?
그 ‘순간’을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자주 되찾는 것이 자기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곳에서 나의 본질이 반짝입니다.

 


7. 나는 나에게 어떤 말을 매일 들려주고 싶나요?

 

“넌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너는 소중해.”
“오늘도 잘 살아냈어.”
매일의 말이 쌓여 나의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결국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됩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아누비스(Anubis)는 단순한 ‘죽음의 신’이 아닙니다.
그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인도하는 자, 영혼의 수호자, 그리고 슬픔 속에서 품위를 지켜주는 존재로서,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신비로운  상징입니다.


🖤 어둠 속을 밝혀주는 신, 아누비스의 이야기

 

— 죽음의 문을 지키는 자의 조용한 사랑

 

사막의 모래바람이 지나간 그 땅,
나일강을 따라 영혼의 숨결이 흐르던 고대 이집트에서
한 신이 조용히 죽은 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자칼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밤하늘처럼 검은 존재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하고, 기도하며, 마지막 길을 맡겼다.

 

그의 이름은 아누비스(Anubis).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 아닌 ‘문’이라 여겼고,
그 문 너머로 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자,
바로 아누비스였다.

 


 

🕯 죽은 자의 심장을 들어 올리는 자

 

아누비스는 망자의 장례를 주관하는 신이다.
그는 무덤을 정결히 하고,
죽은 자의 몸을 정성껏 미이라로 만들며,
영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았다.

 

그리고 심장의 무게를 재는 의식,
그 신성한 순간에 아누비스는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망자의 심장은 깃털과 저울에 올려졌고,
아누비스는 그 영혼이 진실했는지를 지켜봤다.

 

하지만 그는 심판자가 아니었다.
심판은 오시리스와 마아트의 몫이었고,
아누비스는 그저 공정하게, 조용히, 따뜻하게
그 과정을 돕는 안내자였다.

 

 


 

🐺 왜 자칼인가? — 외로움 속의 수호자

 

아누비스는 왜 자칼의 머리를 하고 있을까?
자칼은 사막의 무덤가를 떠도는 야생 동물이다.
무덤을 지키고, 때론 파헤치기도 하며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존재.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자칼을
‘죽은 자를 돌보는 수호자’로 여겼고,
아누비스는 그 이미지로 사람들 곁에 남았다.

 

죽음을 무섭지 않게 만들기 위해,
그 무서운 존재를 오히려 친숙한 동반자로 만든 것이다.
죽은 자가 홀로 가지 않게 하려는
인간의 깊은 연민이 만든 신이 바로 아누비스다.

 

 


 

🌌 혼자의 죽음은 없다 — 아누비스의 진짜 메시지

 

어쩌면 아누비스는
모든 이들이 품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어루만지는 신이었을지 모른다.

 

삶이 끝나는 곳에서
누군가 조용히 나의 손을 잡아주고,
나의 마음을 들어 올려주고,
내가 살아온 날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길을 함께 걸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일까.

 

아누비스는 바로 그 위로였다.
그는 ‘죽음의 신’이 아니라
사랑과 품위의 신이었다.

 

죽은 자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건,
어쩌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조용히 품는 일.
심장을 무겁게 하지 않도록,
살아 있을 때마다 진실하게 살라
그 조용한 속삭임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 우리 안의 아누비스

 

우리는 매일 작은 죽음을 겪으며 살아간다.
관계의 끝, 습관의 끝, 계절의 끝, 사랑의 끝…
그때마다 우리에겐 작은 아누비스가 필요하다.
그 끝을 품고, 새로운 문을 열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

 

그리고 때로는,
내가 누군가의 아누비스가 되어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끝을 지켜주고,
손을 잡고 말해주는 것이다.

“괜찮아, 잘 왔어. 이제 새로운 시작이야.”

 


 

아누비스는 멀고 신비한 신이 아니다.
그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끝을 받아들이는 힘,
조용히 곁에 머무는 사랑,
존엄을 지켜주는 의지
다.

 

당신이 지금 어떤 ‘끝’ 앞에 서 있다면,
아누비스가 당신 손을 꼭 잡아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해줄 거예요.

“두려워 마, 혼자가 아니야.”

“모든 끝은 새로운 생의 문이니까.”

 

“기다렸어, 드디어 너를 만났구나” — 그 만남 이후의 이야기

 

그날, 내 안에서 들려온 조용한 목소리.
“기다렸어. 드디어 너를 만났구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누군가에게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더더욱.

 

살아오며 나는 늘 ‘되어야 할 나’를 좇았습니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나를 조금씩 구겨가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렸어’라는 말은
내가 외면했던, 내 안의 진짜 나—
아직도 상처받은 채 울고 있던 그 아이가
오랜만에 내 눈을 바라보며
용기 내어 건넨 인사였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마주합니다.
잘 보이기 위한 나,
더 나아지기 위한 나,
무언가를 성취해 증명하려는 나를 내려놓고,
그냥 있는 그대로, 숨 쉬고 있는 이 나를.

 

그 순간부터 나는 매일 조금씩 새로운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연습,
나를 이해하는 연습,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바라보는 연습.

 

어느 날은 마음이 심하게 출렁입니다.
여전히 예전의 패턴대로 나를 비난하려 들기도 하고,
다시 바깥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는 마음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용히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말합니다.

 

                                                   “ 괜찮아,  나는 지금 내 편이야. ”

 

그 다정한 속삭임 하나가
혼란의 파도를 잠재우는 힘이 됩니다.
누군가에게서 받지 못한 다정함을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삶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는 깨닫습니다.
치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번에 나아지는 기적이 아니라,
다시 나와 연결되고,
그 연결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매일의 다짐’이라는 것을.

 

어느 날 아침엔 햇살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빛은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처음으로 이 빛을 ‘내 것’으로 느낀다.”

 

내면으로의 여행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 나에게 묻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너는 어땠어?”
“어디가 힘들었어?”
“무엇이 너를 웃게 했어?”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고,
그 답을 조용히 안아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내 안의 내가, 드디어 나의 친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됩니다.
나는 나를 떠난 적 없었다는 것을.
그저 너무 오랜 시간, 나를 등진 채 살아왔을 뿐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 신성하고도 단순한 기쁨을 안고,
다시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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