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는 내 삶의 정체를 정인의 과다로 설명해 왔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분석이 지나쳐서, 그래서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 설명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연결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하나의 개념을 붙잡으면 끝까지 파고들었고,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멈춰 있는 이유도 ‘너무 많이 알아서’라고 결론 내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해는 계속 늘었는데, 삶의 장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상했다. 정말 문제는 많음일까. 정말 정인이 많아서 시간이 멈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요즘 나는 그 원인을 조금 다르게 본다. 멈춤의 원인은 정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식상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쌓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았다. 이해를 안에서만 굴렸고, 말로 꺼내거나 글로 흘리거나 행동으로 시험하는 단계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식상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의 문제인데, 나는 사용을 유예해 왔다.

정인은 저장이다. 정보를 모으고, 맥락을 만들고, 의미를 엮는다. 반면 식상은 배출이다. 지금까지의 이해를 임시 파일 상태로라도 밖에 놓는 일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말해보고, 다 정리되지 않아도 써보고, 틀릴 가능성을 안고 행동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없으면 정인은 계속 내부에서만 순환한다. 그 순환이 길어지면, 이해는 깊어지기보다 굳어진다.

나는 그 굳어짐을 ‘시간이 멈췄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실 시간을 멈춘 건 내가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에 내 생각을 태우지 않았을 뿐이다. 배출되지 않은 이해는 사건을 만들지 못한다. 사건이 없으니 기억도,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멈춰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중요한 건 이해는 완성된 뒤에 나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나가면서 바뀐다. 말해보니 허점이 보이고, 써보니 핵심이 드러나고, 행동해 보니 전혀 다른 질문이 생긴다. 식상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 완성만 기다리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나는 기준을 바꾸고 있다. ‘잘 썼는가’보다 ‘밖으로 나갔는가’를 묻는다. 한 편의 글을 끝내기보다, 한 조각의 생각을 흘려보내는 데 집중한다. 정리된 결론 대신, 지금 단계의 이해를 그대로 놓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생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도 같이 움직인다.

아직 나는 이 방식이 완전히 맞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를 멈춰 세웠던 건 정인이 아니라, 식상을 쓰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이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시간은 아주 조금씩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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