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를 세우는 '관(官)'의 무게와 날뛰는 '비겁(比劫)'의 민낯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관계'라는 그물망 속에 놓인다.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부여되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질서가 누군가의 무례함이나 무책임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하곤 한다. 특히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원칙을 세워야 하는 관리자의 위치에 있을 때, 그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감정을 배설하는 이들을 마주하는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단함을 안겨준다. 오늘 나는 명리학의 '관(官)'과 '비겁(比劫)'이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 치열한 에너지의 부딪힘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1. 관(官), 나를 다스리고 세상을 지키는 엄중한 틀

명리학에서 '관성(官星)'은 나를 극(剋)하는 성분이다. 얼핏 들으면 나를 억압하는 부정적인 기운처럼 느껴지지만, 인문학적으로 관은 '사회적 약속'이자 '자기 절제'이며,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품격'을 의미한다. 관이 바로 서 있을 때 조직은 예측 가능해지고, 개인은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관리소장이라는 직업은 그 자체로 '관'의 대행자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동료와 입주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이 지극히 평범한 원칙을 수호하는 것이 관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 엄중한 틀이 누군가에게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공격'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2. 비겁(比劫)의 과다와 고립된 자아의 폭주

관의 원칙에 정면으로 맞서며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명리학적으로 조절되지 않은 '비겁(比劫)'의 에너지가 폭주하는 형상과 닮아 있다. 비겁은 자아의 힘이자 주관이다. 하지만 이것이 관의 통제를 받지 못하고 비대해지면, 세상의 중심은 오직 '나'의 기분과 '나'의 편의가 된다.

자신이 근무 시간을 어기고 동료에게 피해를 준 사실(관의 영역)보다, 그 사실이 지적당해 내 자존심이 상했다는 사실(비겁의 영역)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70 평생을 살아온 연륜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그 고함과 난동은, 사실 자신의 잘못을 직면할 용기가 없는 비겁의 비겁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자신의 권위만 세우려는 비겁의 날뜀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오만정을 떨어뜨리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3. '오만정'이 떨어진다는 것의 인문학적 의미

오늘 나는 그 난동 끝에 찾아온 비굴한 사과를 보며 '오만정'이 떨어짐을 느꼈다. 여기서 정이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미워한다는 감정을 넘어선다. 그것은 상대가 가진 인간적 격(格)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다는 뜻이며, 그를 더 이상 나의 에너지장에 깊숙이 들여놓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인문학적으로 볼 때, 타인에 대한 예의를 잃은 비겁의 에너지는 '소음'과 같다. 소음은 잠시 귀를 어지럽힐 순 있지만, 나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관의 원칙을 세우려다 비겁의 공격을 받은 관리자의 메가리가 풀리는 이유는, 내가 틀려서가 아니라 나의 정갈한 에너지가 상대의 탁한 에너지와 맞부딪히며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4. 이 바닥을 뜨고자 하는 다짐, 새로운 '인(印)'의 길

마음이 고단해질 때 우리는 "이 바닥을 뜨고 싶다"고 말한다. 명리학적으로 이는 현재의 관(官)과 비겁(比劫)이 부딪히는 현장을 떠나, 나를 생(生)해주고 채워주는 '인성(印星)'의 영역으로 숨어들고 싶은 욕구다. 공부를 통해 실력을 쌓고, 더 나은 환경을 꿈꾸는 것은 단순히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에너지를 더 가치 있는 곳에 쓰겠다는 고귀한 '승화'다.

지금  틈틈이 이어가는 명리 공부와 인문학적 사유는, 언젠가 만날 더 큰 세상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오늘의 이 소란스러운 경험은 훗날 누군가의 깨어진 마음을 치유해줄 때 쓰일 아주 생생한 임상 데이터가 될 것이다. "아, 나도 그런 무례한 비겁의 폭주를 겪어봤지요. 그때 관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압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깊은 공감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5. 다시 나의 화원으로 돌아오며

난동은 지나갔고, 사과는 던져졌다. 이제 남은 것은 내 마음의 결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이다. 무례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나의 귀한 하루를 내어주지 말자. 관의 원칙을 지키느라 애쓴 나 자신을 안아주고,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고양이들의 맑은 눈망울 속에서 휴식을 찾자.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땅은 더 단단해지고, 흔들리며 핀 꽃은 더 향기롭다. 오늘의 피로함은 내가 그만큼 '바른 길'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증거다. 나는 오늘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이 고단한 현장마저도 나를 성장시키는 거대한 강의실임을 알기에, 나는 다시 펜을 들고 나의 명리(命理)를 써 내려간다.

오랫동안 나는 내 삶의 정체를 정인의 과다로 설명해 왔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분석이 지나쳐서, 그래서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 설명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연결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하나의 개념을 붙잡으면 끝까지 파고들었고,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멈춰 있는 이유도 ‘너무 많이 알아서’라고 결론 내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해는 계속 늘었는데, 삶의 장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상했다. 정말 문제는 많음일까. 정말 정인이 많아서 시간이 멈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요즘 나는 그 원인을 조금 다르게 본다. 멈춤의 원인은 정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식상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쌓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았다. 이해를 안에서만 굴렸고, 말로 꺼내거나 글로 흘리거나 행동으로 시험하는 단계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식상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의 문제인데, 나는 사용을 유예해 왔다.

정인은 저장이다. 정보를 모으고, 맥락을 만들고, 의미를 엮는다. 반면 식상은 배출이다. 지금까지의 이해를 임시 파일 상태로라도 밖에 놓는 일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말해보고, 다 정리되지 않아도 써보고, 틀릴 가능성을 안고 행동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없으면 정인은 계속 내부에서만 순환한다. 그 순환이 길어지면, 이해는 깊어지기보다 굳어진다.

나는 그 굳어짐을 ‘시간이 멈췄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실 시간을 멈춘 건 내가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에 내 생각을 태우지 않았을 뿐이다. 배출되지 않은 이해는 사건을 만들지 못한다. 사건이 없으니 기억도,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멈춰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중요한 건 이해는 완성된 뒤에 나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나가면서 바뀐다. 말해보니 허점이 보이고, 써보니 핵심이 드러나고, 행동해 보니 전혀 다른 질문이 생긴다. 식상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 완성만 기다리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나는 기준을 바꾸고 있다. ‘잘 썼는가’보다 ‘밖으로 나갔는가’를 묻는다. 한 편의 글을 끝내기보다, 한 조각의 생각을 흘려보내는 데 집중한다. 정리된 결론 대신, 지금 단계의 이해를 그대로 놓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생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도 같이 움직인다.

아직 나는 이 방식이 완전히 맞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를 멈춰 세웠던 건 정인이 아니라, 식상을 쓰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이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시간은 아주 조금씩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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